혼자만의 생각

프란츠 폰 바더에 있어 '대지'는 '낙하'를 멈추게 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며, '대지(terra)'란 말을 거꾸로 읽으면 '정지(arret)'라는 뜻이 된다.

라일락 꺽꽂이

길가 빨간 고무통에 올해도 라일락이 싹을 틔웠다.
그 5월의 진한 향기를 집안으로 들이고 싶어서 꽃도둑이 되었다.

이미 잎이 초록을 뽑내며 목을 길게 늘이고 있던 가지는 반으로 잘려 화분에 옮겨 심어졌다. 
그리고 누군가가 키워주지 않은 방식으로 처음 화분을 만들면서 너무나 상식적인 일 이었을텐데도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사실을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는 나를 발견한다.

이미 자란 잎은 필요가 없었다.
무조건 라일락 나뭇가지는 마디에서 
잎이 아니라 새로운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물과 흙과 빛이 아니라
물과 흙과 어둠이라는 사실에
세계수가 순간 작은 화분 안에 깃든다.
이미 자란 잎이 여리고 예뻤는데
과감하게 이발을 했다.

두 이오난사

왼편의 이오난사는 가을이 지나 신기한 보라색 꽃이 피었드랬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아주 작고 여린 빛깔의 이오난사가 옆구리에서 생겨났다.
캥거루도 아닌 것이 작은 새끼를 끼고 있는거다. 그저 신기했다.

오른편 이오난사는 꽃이 피지않았다.
분명 크기가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오늘보니 부쩍 크기가 크다.
아무리 보아도 키도크고 쭈욱 바깥으로 자라는 모양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모양새가 어쩜 저리 같을까!
올해  혼자 큰 이오난사가 꽃을 피울지 궁금하다.

"x는 y를 안다."

비온은 매번 나를 당황하게 한다. 우리가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고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다.
안다는 것은 신선함을 잃게 되고 더 이상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져간다.
그리고 하나의 경험이 떠오른다.
'내가 널 알아' 라는 한 사람의 말에 불같이 화를 났던 기억...
어떻게 나를 안다고 말했을까? 자신을 투사해서 자신과 같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에게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아느냐?'고 질문을 했었다.
그리고 내내 나를 안다고 말하는 그 사람이 불편했다. 
......
그리고 스터디에서 내게 정신분석이란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가운데 조금씩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전해주었을 때, 보다 더 모르는 것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내가 과연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비온에게 안다=정신분석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관계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나는 비온 이전에 사람이 나무처럼 매해 껍질을 벗고 새로워진다는 니체의 말을 생각한다. 늘 새로워서 다시 궁금해지고 알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 관계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Circle Process Workshop

맘에 마음 더하기 특강에 참여해서 워크샵일원이 되었습니다.
작은 공이 왼쪽으로 한명 한명 건네질때마다
자녀들의 폭력 피해를 경험한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전해집니다.
죽음을, 장애를, 마음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어머니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폭력적이게 만들고 또 피해를 입게 하는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은 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게만 느껴지고 심연을 두드려 울컥하게 만듭니다. 나에게 공이 돌아오기전까지도 나는 아무 할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 한발을 들고 두 팔을 벌린채 서 있는 아이건 박사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흔들리는 상태에서도 쓰러지지 않은 채 
삶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마음과 함께 저를 소개했습니다. 
"저는 마음의 아픔을 듣는 치료사입니다....삶의 균형을 잡는 다는 건..."

갈라진 마음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진실 앞에서
피해의 사건들을 수치로 받아들이고
권력의 힘으로 감추려고 하는 씁씁한 사회의 민낯에 맞서 
그분들이 피해의 폭력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또 말들이 상처가 되어 다시 되돌아 가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때로는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흔들리며 살아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날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한 그루의 나무에서 
가지가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 
떠오르는 삶을 돌아보게 하는 시...

유연성을 가질 것.
있어야 할 때 있어주고 빠져야 할 때 빠져줄 것.
그리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
거.짓.자.기!

달리 & 클림트

정신분석을 만나기 전의 일입니다.
그때는 세상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종일 그림과 씨름을 하고 있었던 고등학생이었고 대학로 어느 서점에서 쪼그리고 앉아 달리의 화집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그림을 만났던 건 바로 그때, 두꺼운 화집에 조그맣게 인쇄된 순진무구한 아기가 쥐를 물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치고 어떻게 아이를 저렇게 표현을 했을까싶어서 달리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고 기묘한 꿈을 꾸는 화가라고 생각하면서도 몇 년 동안 달리의 그림은 가까이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흘러 정신분석을 알게 되었고 멜라니 클라인과 만나 그때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달리의 그림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클라인은 리비도의 직접적인 표현이 무의식적 환상이며 그 환상 안에서 어머니의 몸 안에 있다고 믿는 좋은 것들을 시기하여 가학적으로 물어뜯고 고갈시키며 대변과 소변으로 공격을 한다고 말합니다.
클라인에게 있어서 인간은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가위로 자른 종이에서 피가 흐른다고 말합니다.
잘린 종이에 사람이라도 프린트 되어 있을라치면 아파한다고 인격화시키기도 합니다.

그제서야 제 안에서 달리가 용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선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일어나는 환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한때는 아기였고 지금도 아기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만약 그 환상의 공격으로부터 견뎌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면 아기에게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까요? 그걸 기억할 수 없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괜찮은 환경을 만나 시기심을 감사함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니 그것 참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만 어지간한 노력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수고로움이 때로는 지치게도 만들지요. 
아기가 조금 자란다면 부모라는 세상이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사랑스럽고 행복하다고 말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클림트의 그림에서처럼 행복한 꿈을 꾸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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